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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릇된 믿음들이 사라지지 않는 이유

올코멘트 2022. 9. 14. 0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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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regory W. Lester (세인트 토마스 대학교 심리학 교수)

 

                                         

믿음이 틀릴 수도 있다는 것이 이성적 사고와 과학적인 탐구의 기본 원리이기 때문에 과학자들과 회의론자들은 믿음이 틀렸음을 보여주는 명백한 증거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많은 사람들의 믿음이 변하지 않는 것을 볼 때면 종종 혼란스러워하고 짜증을 낸다. 우리 회의론자들은 데이타에 상반되는 믿음을 사람들이 어떻게 지속할 수 있을까 하고 궁금해 한다.

이런 곤혹스런 일로 인해 우리 회의론자들은 뚜렷한 증거에도 불구하고 믿음을 바꾸지 않는 사람들을 멸시하고 얕잡아보는 경향이 있다. 믿음을 바꾸지 않는 사람들을 열등하다느니 멍청하다느니 또는 미쳤다느니라고 한다. 이러한 태도는 회의론자들이 믿음의 생물학적인 목적과 변화에 고집스럽게 저항해야 하는 뇌신경학적인 필요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서 생기는 현상이다. 매사에 엄격한 사고를 해야 됨에도 불구하고 많은 회의론자들이 믿음이 무언지 왜 심지어 그릇된 믿음조차 쉽사리 사그러들지 않는지를 명확하게 혹은 합리적으로 이해하지 못하는 게 사실이다. 그러나 믿음의 생물학적인 목적을 이해하게 되면 회의론자들은 훨씬 더 효과적으로 비합리적인 믿음에 도전하고 과학적인 결론을 커뮤니케이션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생물학과 생존

뇌의 주된 목적은 우리를 생존시키는 것이다. 분명 뇌는 생존시키는 것 이상의 것을 하지만 생존이 늘 주된 목적이며 모든 일에서 우선시된다. 만약 우리가 부상을 입어 신체가 의식이나 심장박동 둘 중에 하나만을 지탱해 줄 정도의 에너지 밖에 없게 된다면 우리의 뇌는 의식을 포기하고 심장박동을 선택한다. 즉 죽음에 대한 경고를 주기보다는 뇌사 상태에 빠져가면서까지 심장은 계속해서 박동한다. (즉 뇌는 의식보다 생존을 먼저 염두에 둔다.)

모든 뇌 활동은 근본적인 생존 목적을 위해 있기 때문에 뇌 기능을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생존의 도구로서 뇌의 가치를 검토해 보는 것이다. 심지어 비만이나 물질 중독과 같은 행동장애를 성공적으로 치료하는 데 따르는 어려움조차도 이것들과 뇌의 생존관계를 검토해 보면 이해할 수 있다. 칼로리 섭취량이나 중독된 물질이 줄어들게 되면 우리의 뇌는 이를 생존의 위협으로 간주한다. 그 결과 뇌는 과식이나 물질남용을 강력하게 방어하여 그러한 장애를 가진 사람들에게서 자주 보듯이 거짓말, 꼼수(sneaking), 부인, 자기 합리화 및 자기 정당화를 만들어낸다.

 

오감과 믿음

생존을 확보하기 위한 뇌의 주된 도구 중 하나는 우리의 감각(sense)이다. 분명 우리는 우리를 안전하게 지켜주도록 고안된 행위을 하기 위해선 위험을 정확히 감지할 수 있어야 한다. 생존하기 위해서는 동굴에서 나올 때 우리에게 달려드는 사자를 볼 수 있어야 하며 한밤중에 우리의 집을 침입하는 도둑의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오감만으론 위험을 효과적으로 감지할 수 없다. 왜냐하면 오감은 그 범위가 극히 제한되어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어느 한 시점에서 세상의 극히 일부만을 오감으로 감지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은 정상적인 일상생활을 할 때에도 오감이 주변을 감지하지 못하는 상황이 자주 벌어지기 때문에 인간의 뇌는 이를 중대한 문제로 간주한다. 우리가 전에 보거나 들은 적이 없는 영토에 들어갈 때 우리는 잠재적인 위험을 미리 경고해주지 않는 위험한 위치에 처하게 된다. 만약 내가 위험한 지역에 있는 낯선 건물에 들어가게 되면 건물 지붕이 무너져 내릴 건지 아니면 총잡이가 문 뒤에 숨어있을 건지를 알 수 있는 방법이 없기 때문에 나의 생존 가능성은 줄어들게 된다.

그러므로 믿음이 생기는 것이다. "믿음"은 우리의 오감이 위험 감지 기능을 확대하고 향상시키기 위해 고안된 뇌의 생존 도구에 우리가 붙인 이름이다. 믿음은 우리가 낯선 영토를 들락거릴 때 우리가 위험을 더 잘 감지해서 생존 가능성을 향상시킬 수 있도록 오감이 감지할 수 있는 영역을 확대시켜 준다.

기능상 우리의 뇌는 믿음을 오감이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는 세상을 볼 수 있도록 해주는 내적인 “지도”(map)로 다룬다. 가령 내가 거실에 앉아있으면 나는 밖에 세워 둔 내 자동차를 볼 수 없다. 비록 내가 자동차를 얼마 전 주차장에 주차했지만 즉각적인 오감 정보를 사용해서는 자동차가 아직도 주차장에 있는지 없는지 알 길이 없다. 그 결과 오감은 내 자동차에 관하여서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효율적으로 내 자동차를 찾기 위해서는 (뇌는 엄격하게 문자적인 감각의 의미로 의존하나 나로 하여금 자동차를 찾아내게 하는 데 도움을 주지 못할 뿐만 아니라 더 이상 차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현재의 감각 데이타를 무시해야 한다. 그 대신 내적 지도에 의존해 내 자동차의 위치를 파악한다. 이건 바로 내 자동차가 내가 세워두었던 주차장에 여전히 있을 거라는 나의 믿음이다. 오감을 통해서 오는 데이타가 아닌 내 믿음에 의존함으로써 나의 뇌는 즉각적인 오감의 접촉이 없는 세상에 대한 무언가를 "알 수 있다." 이렇게 함으로써 세상에 대한 뇌의 지식을 "확장시킨다." 우리의 오감이 감지할 수 없는 세상에 대한 우리의 접촉을 확대하는 믿음의 능력으로 인해 우리의 생존력은 향상된다. 혈거인은 자신의 오감을 통해서 오는 데이타가 즉각적인 위협이 없다고 보여줄 때에도 정글에 위협이 존재할 거라는 믿음을 유지할 수 있을 때 삼아 남을 가능성이 훨씬 더 커진다. 교통경찰은 교통법규를 어긴 사람을 세웠을 때 운전자가 설혹 선량해 보이더래도 언제라도 자신을 해칠 수 있는 무장한 자라고 믿는다면 자신을 훨씬 더 보호할 수 있다.

 

오감을 넘어서

믿음은 오감을 통해 오는 즉각적인 데이타가 뇌에 가치있는 생존 정보를 제공하도록 요구하지 않기 때문에 오감을 직접적으로 다루지 않는 삶의 영역에 관한 정보를 제공하는 부수적인 생존 기능을 가지고 있다. 그 기능이란 "이유"나 "원인", 그리고 "의미"와 같은 것을 포함하는 추상과 원리의 영역이다. 나는 내가 퍼레이드를 할 때 폭우를 만들어내는 "저기압 지역"이라 불리는 "이유"를 귀로 듣거나 눈으로 볼 수 없다. 그래서 저기압이 그 이유일 거라고 믿을 수 있는 나의 능력이 나를 지원한다. 만약 내가 폭우의 원인을 알아보기 위해 전적으로 오감에만 의존한다면 나는 왜 그게 일어났는지 알 수 없을 것이다. 내가 아는 것이라곤 내가 구름을 없애고 싶다면 내가 총으로 쏘아 쫒아낼 필요가 있는 눈에 안보이는 날아가는 작은 악마들이 폭우를 몰고 온 것이었다. 그러므로 오감을 통해 얻어진 자료보다는 뇌가 "저기압"으로 불리는 이유에 대한 내 믿음에 의존함으로써 내 생존을 보조한다. 나는 공중에 대고 이 까다로운 작은 악마들을 겨냥해 총을 쏴 댄 이유로 수많은 위험한 죄수들과 같은 감방에 갇힐 수 있는 위험을 피하는 것이다.

 

끈질긴 믿음들

오감과 믿음은 둘 다 생존의 도구로 진화하는 과정에서 서로를 강화하기 때문에 우리의 뇌는 오감과 믿음을 별개이기는 하나 둘 다 동등하게 생존 정보를 제공해주는 중요한 제공자로 본다. 이 중 어느 하나를 잃게 되면 우리는 위험에 처하게 된다. 오감이 없다면 우리는 오감이 감지할 수 있는 세상의 영역에 대해 알 수 없을 것이다. 믿음이 없다면 우리는 우리의 오감이 감지할 수 없는 세상이나 의미, 이유 혹은 원인에 대해 알 수 없을 것이다.

이는 곧 믿음이란 오감을 통해서 얻어지는 데이타와는 별도로 작동하도록 설계되어 있음을 뜻한다. 사실 믿음의 총 생존 가치(the whole survival value of beliefs)란 모순되는 증거에도 불구하고 지속하는 능력에 기초한다. 믿음은 틀렸음을 입증하는 증거에도 불구하고 쉽거나 간단히 변화하도록 되어 있지 않다. 만약 이게 사실이 아니라면 믿음은 가치있는 생존 도구가 되지 못할 것이다. 만약 오감을 통해서 오는 정보가 그에게 즉각적인 위험이 없다고 말할 때마다 정글에 잠재적인 위험이 있을 거라는 혈거인의 믿음이 사라진다면 오래 생존하지 못할 것이다. 전혀 무해해 보이는 얼굴 뒤에 살인자가 숨어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믿지 않는 경찰관은 쉽게 다치거나 살해될 수도 있는 것이다.

인간의 뇌에 관한한 오감을 통해 오는 데이타와 믿음이 일치해야 할 필요성이 전혀 없다. 정보와 믿음은 세상의 각기 다른 영역을 점촉함으로써 서로를 보충하고 보완하도록 진화해온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둘은 서로 일치하지 않도록 설계되어 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과학자들도 신을 믿을 수 있는 것이며 이치적이며 합리적인 사람들도 보통 UFO나 텔레파시나 염력 같은 신빙성 있는 자료가 없는 것들도 믿을 수 있는 것이다.

데이타와 믿음이 충돌하게 될 때 우리의 뇌는 자동적으로 데이타에 우선권을 주지는 않는다. 이런 이유 때문에 믿음—심지어 나쁜 믿음, 비합리적인 믿음, 어리석은 믿음 혹은 미친 믿음—이 상반되는 증거 앞에서도 종종 사라지지 않는 것이다. 인간의 뇌는 그 믿음이 데이타와 일치하는지 아닌지에는 관심이 없다. 뇌가 관심을 갖는 건 그 믿음이 생존에 도움이 되느냐이다. 과학적이고 합리적으로 생각하는 뇌 부위는 데이타가 이와 상충되는 믿음을 대체해야 한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더 근본적인 중요성 때문에 우리의 뇌는 그러한 편견을 갖지 않는다. 그러한 믿음을 버리는 건 엄청 힘들다. 전쟁이 이미 끝났는데도 이 사실을 신뢰하지 못해 오래된 총을 버리지 못하는 어느 일본군인처럼 무기를 버려야하는 것을 알면서도 우리의 뇌는 그 무기를 포기하지 말라고 한다.

 

"이치에 닿지 않는믿음들

(잠재적인 위험을 믿는 혈거인의 능력처럼) 생존과 직접적으로 연결되거나 분명히 연결되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믿음들 조차 여전히 생존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이건 바로 믿음이 개인적으로나 진공 상태에서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들은 세상의 성격에 대한 뇌의 근본적인 견해를 만들어내는 밀접하게 묶는 시스템 안에서 서로 연관되어 있다. 세상에서의 연속성과 통제, 밀접성 그리고 안전을 경험하기 위해서 뇌가 의존하는 것은 바로 이 시스템이다. 생존이 성공적으로 성취되고 있다고 느끼기 위해서는 이 시스템을 지속시켜야만 한다.

이는 곧 심지어 작고 하찮은 것처럼 보이는 믿음조자도 생존에 "분명히" 연결되어 있는 믿음만큼이나 뇌의 생존 경험에 필수적일 수 이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그게 아무리 작고 어리석게 보일지라도 어떠한 믿음이든 변화를 주려 하는 것은 전체 시스템에 걸쳐 연쇄작용을 일으켜 궁극적으로 뇌의 생존 경험에 위협을 가할 수 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사람들은 작고 보잘 것 없어 보이는 믿음조차도 방어하려고 하는 것이다. 창조설론자들(creationists)은 그 데이타 자체의 정확성이나 부정확성 때문이 아니라 성경의 문제와 창조의 성격과 관련된 하나의 믿음조차 변경하게 되면 세상에 대한 근본적인 견해인 전 믿음 시스템, 궁극적으로 뇌의 생존 경험을 깨기 때문에 진화론의 실제를 보여주는 데이타의 정확성을 믿는 걸 참을 수 없는 것이다.

 

이게 회의론자들에게 무엇을 뜻하는가? 

회의론적인 사상가들은 믿음의 생존 가치때문에 불편한 증거라도 "다른 면에서는 똑똑한" 사람들의 믿음을 바꾸기에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아야한다. 믿음을 효과적으로 바꾸기 위해서는 회의론자들은 그들의 데이타가 정확하다는 가치가 아니라 그들의 생존 가치에 신경을 써야한다. 이것에는 몇 가지 요소가 포함된다.

먼저 회의론자들은 사람들의 믿음이 변하지 않는다고 해서 사람들이 멍청하다고 추정하거나 데이타의 결과로 믿음이 변할 것이라고 기대해서는 안된다. 회의론자들은 믿음의 탄력에 반응하여 비평적이 되거나 우습게 여기는 것을 피해야한다. 사람들의 믿음이 새로운 정보에 굴복하지 않는다고 해서 사람들이 반드시 멍청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데이타는 늘 필요하지만 좀처럼 충분한 것이 아니다.

둘째, 회의론자들은 그 데이타가 언급하는 특정한 주제뿐만 아니라 관련된 믿음을 바꾸는 것이 개인의 근본적인 세상관과 믿음체계에 미치게 될 함축된 영향도 늘 토론하는 법을 배워야한다. 불행히도 믿음체제를 언급하는 것은 단순히 모순되는 증거를 제시하는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힘든 일이다. 회의론자들은 총체감(a sense of wholeness), 일관성, 삶의 컨트롤 같은 감을 유지하기 위해 그 믿음 체계를 뇌가 유지할 필요가 있다는 사실에 직면하여 그들의 데이타의 의미를 토론해야한다.  회의론자들은 믿음이 도전을 받게 될 때 자극되는 근본적인 철학과 존재적 불안의 이슈를 능숙하게 토론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회의론자들의 과제란 모든 면에서 과학적이고 데이타에 기초한 것만큼이나 철학적이고 심리적이다.

셋째, 어쩌면 이 셋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일 수 있는데, 회의론자들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믿음에 도전을 받는 게 얼마나 힘든지를 늘 이해해야 한다. 이건 문자 그대로 그들의 뇌의 생존감에 위협이 된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그러한 상황에서 방어적이 되는 것은 지극히 정상이다. 인간의 뇌는 자신의 생존을 위해 싸운다고 느낀다. 이로 인해 자극적이고 적대적이고 심지어는 악의적인 행위를 초래할 수 있다는 것은 불행하나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회의론자들이 배울 수 있는 교훈은 사람들이 도전을 받을 때 일반적으로 야비하고 반대적이고 거칠거나 멍청하게 되려는 게 아니라는 걸 이해하는 것이다. 이러한 형태의 방어를 다루는 유일한 효과적인 방법은 그 싸움을 격화시키는 것보다 그 싸움을 완하시키는 것이다. 냉소적이거나 비웃는 행위는 계속해서 진실에 초점을 맞추기 보다는 상대방에게그들이 위협받고 있다는 느낌을 정당화시켜주는 감정 싸움의 빌미를 제공해줄 뿐이다. ("물론 우리는 사랑이라곤 눈꼽만큼도 없고 악의적인 회의론자 놈들과 싸우는 것이야!")

회의론자들은 다른 사람으로부터 방어적인 반응을 보이더라도 계속해서 위엄을 지키고 기술적인 행동을 하면서 존경과 지혜를 교통하는 행동을 함으로써 합리적인 믿음을 위한 전쟁에서 승리를 할 것이다. 데이타가 큰 소리를 내도록 하기 위해서는 회의론자들은 늘 소리지르는 것을 삼가야 한다.

마지막으로 이 모든 것의 참으로 놀라운 부분은 변하는 믿음이 거의 없어서가 아니라 또는 사람들이 그렇게 비합리적이어서가 아니라 어느 누구의 믿음도 변한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은 모든 회의론자들에게 위안이 되어야 할 것이다. 데이타에 반응하여 그들 자신의 믿음을 바꿀 수 있는 회의론자들의 능력은 참으로 독특하고 강력하고 값진 능력이요 은사이다. 가장 자연적이고 근본적인 생물학적인 충동에 반하여 작동한다는 점에서 이는 진정으로 "더 높은 뇌 기능"이다. 회의론자들은 그 능력에 감사해야 하며 참으로 이 능력이 그들에게 부여하는 위험성에 감사해야 한다. 회의론자들은 그들 소유에 놀랍고 삶을 변화시키고 고통을 유발시킬 능력이 있는 기술을 소유하고 있다. 이 능력을 다른 사람들에게 적용할 때는 조심스럽고 지혜롭게 사용되어져야 한다. 믿음을 바꾸는 것은 늘 주의와 연민을 동반해 이루어져야 한다.

회의론자들은 그들의 눈을 늘 목표에 맞추어야 할 것을 기억해야한다. 그들은 먼 앞을 내다보아야 한다. 어느 한 특정 개인이나 어느 특정한 믿음이나 어느 한 특정 전투에서 죽도록 싸워 이기려 할 게 아니라 합리적인 믿음을 위한 전쟁에서 이기려 해야 한다. 회의론자들의 방법과 데이타는 깨끗하고 직접적이고 편견이 없어야할 뿐만 아니라 언행도 이에 걸맞아야 한다.

 

 

저자에 대해서

Gregory W. Lester, 박사이자 텍사스 휴스톤의 세인트 토마스 대학의 대학원 심리학 교수이자 휴스톤과 콜로라도 덴버에서 심리학자로 활동하고 있음.

주소: Gregory Lester, 철학 박사., 111 Harrison St., Suite 1, Denver, Colorado 80206

 

위 기사 출처: 

https://cdn.centerforinquiry.org/wp-content/uploads/sites/29/2000/11/22164838/p40.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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