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감/게임] 루프란의 미궁과 마녀의 여단, 명작 DRPG 잔혹동화
부신제로 이후 거의 10년도 넘어서 간만에 제대로 즐긴 DRPG(던전RPG)다. 위저드리로부터 시작된 이 던전 RPG는 격자로 구성된 맵을 돌아다니면서 파밍을 하고 몹과 싸우면서 렙업을 하는게 주된 RPG다. 보통은 위로 올라가는 탑이나 아래로 내려가는 지하 던전이 배경이 된다. 매 층을 싸우면서 잠긴 문을 열거나 막힌 미로를 돌파하는 등의 퍼즐로 구성이 되고, 그 마지막에 보스를 해치우면 다음 맵으로 진행되는 식이다.
이런 DRPG에 니혼이치의 스타일이 묻었다. 마계전기 디스가이아라고 하면 잘 알 것이다. 보통 99 단위로 노는 스탯을 9999까지 만들기 위해 노가다를 하는 게임말이다. 보통 DRPG는 플레이어가 파티원이 될 캐릭터를 만드는데, 그렇게 만든 유닛을 반복된 전투로 9999까지 늘리는게 이런 게임의 재미다. 어찌보면 노가다의 결정체지만, 그 노가다가 미칠듯 재밌는 게 바로 파밍 게임 아니던가?
이 게임 역시 9999가 최대치이며, 그 9999로 만들기 위한 수단이 마련되어 있다. 능력치를 올릴 수도 있고 무기를 강화시킬 수도 있으며, 불편하긴 하지만 제한은 없다. 그러니까, 시간만 투자하면 9999의 캐릭터가 9999의 무기를 낀 채로 막판 보스를 혼자서 깰 수도 있다는 것이다.
게임시스템적으로만 보자면 매우 재밌는 게임이다. 난이도를 조절할 수 있어서 스토리가 궁금한 사람도 어렵지 않게 엔딩을 볼 수 있고, 게임을 파고들고자 하는 사람에게도 나름 적절한 난이도를 부여한다. 나 역시 방금 진엔딩을 봤으니, 일부러 지옥같은 난이도를 만들고 그걸 자랑으로 삼는 일부 DRPG에 데인 사람이라도 쉽게 할 수 있는 게임이다.
사실 DRPG는 대충 만들어도 중박은 친다. 왜냐면 게임 시스템이 이미 정착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격자모양의 맵과 퍼즐, 아이템, 몬스터 등등... 위저드리나 마이트앤 매직이 만든 시스템만 따라가면 기본 평타는 친다.
하지만 이 게임은 정말 스토리가 대단하다. 마계전기 디스가이아가 그저 게임을 위한 곁가지의 황당한 스토리였다면, 이 루프란의 미궁은 정말로 스토리가 오랜만에 몰입이 되고 안타까우면서도 감동적이어서 마지막 엔딩을 보고 난 후 한참이나 여운에 젖어서 스탭롤을 지켜보아야 했다.
사실 일본 RPG의 주된 레퍼토리이기도 하다. 세계를 멸망시키려는 신적인 존재와 그에 맞서 싸우는 주인공.. 파이널 판타지 최종 보스와 멸망 직전의 분위기를 경험한 알아들을 것이다.
그런데 이건 거기서 한술 더 뜬다. 노멀 엔딩을 보고 난 후 진엔딩까지 달린다. 그러면서, 이야기는 단순히 동화처럼 나쁜 마녀가 있었지만 결국 행복하게 되었답니다.. .식으로 끝이 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진엔딩까지 달리면서 더 큰 노가다와 더 큰 보스들과 더 큰 엔딩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분위기는 잔혹동화를 연상시킨다. 귀여운 인물들이 나오지만 그 배경스토리는 애절하기 그지 없다. 죽음과 고통이 있다. 그리고 그 와중에 너무나 귀엽고 사랑스럽고 긍정으로 가득한 주인공이 나온다면 어찌 몰입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반전의 반전이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이어진다. 사는거 같은데 죽고, 죽는거 같은데 살고.. 그런 애절한 이야기가 계속 이어진다. 스포가 될거 같아서 자세히는 못 적겠지만, 정말 눈물 나는 구간들이 있다. 아마 이걸 애니로 만들었다면 눈물 질질 짤 사람들 많았을 것 같다.
내가 보통 게임을 하면서 스토리 때문에 여운이 남는 적은 별로 없는데, 이건 정말 여운이 길게 남았다.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 하고 끝날줄 알았는데... 역시 죽음이라는 우주의 진리는 아무리 동화라고 해도 용납될 수 없나보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결국 행복을 위해 다시 힘을 내서 싸움을 하는... 그런 깊이 있는 스토리가 펼쳐진다.
그냥 보면 동화 같지만 실제로는 굉장히 잔혹하다. 팔다리 잘리는 내용도 그렇지만 선정적인 부분도 많다. 서큐버스랍시고 나오는 몹을 보면 이게 어찌 성인게임이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든다. 뭐.. 애들 하라고 만든 게임은 아니긴 하지만...
어쨌건 정말 주인공의 대사를 듣는것만으로도 너무 행복한 기분이 드는 게임이었다. 물론 게임 시스템적으로도 굉장히 중독성 있고 재밌어서 막판 보스를 잡기 위해 수십시간 노가다하는 과정도 재미있었다. 정말 강한 적에게 전멸해서 템 다 털린 후에, 독하게 마음먹고 레벨업에 전생까지 하고 강한 무기를 들려 준 후에 다시 그 강했던 몹을 쉭쉭 썰 때의 성취감은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은 알기 힘들 것이다. 이런게 바로 노가다 RPG의 재미 아니겠는가.
어렵지 않으면서도 깊이 있는 구성과 여운이 진하게 남는 스토리로 간만에 70시간 정도를 넘게 즐긴 명작 RPG였다. 이 훌륭한 게임을 만든 회사가 지금 망해간다고 하니 아쉽기만 하다.